높은데 무작정 오르기 : 지리산 01

월요일 아침.

네이버 뉴스를 보다가 문득 지리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공공연히 친구들한테 산에 가자, 바람이나 쐬러 가자 그랬는데,왠지 지금 당장이 아니면 또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그래왔기에.) 퇴근 후, 네이버에서 ‘지리산 산행’이라는 키워드로 대략 검색을 하고, 2박 3일 코스로 남쪽 끝을 향해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일단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차가 없이, 준비도 없이, 계획도 없이 훌쩍 훌쩍 어디론가 떠난다는게, 조금만 더 지나면 그런 설레임들 이내 잊어버릴까봐. ‘나이 먹고 혼자서 머하는 짓이냐?’라던 몹쓸(!) 친구도 있었으나, 사실 몸도 마음도 많이 무겁고 지쳐있는 상태라 작은 활력소가 필요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최종 목적이 산, 그것도 험하고, 험하다는 지리산을 택했는데, 아무리 컨셉이 훌.쩍.떠.나.기.라고 해도 주변을 둘러보니, 등산과 관련된 장비는 단 하나도 없다니…

  • 준비물 : 칫솔(치약도 없이..ㅡ.ㅡ), 1회용 면도기, mp3p, 디카(회사에서 잠시 빌린.ㅋ), 신용카드, 현금 12만원, 신분증, 롯데백화점 상품권(이건 왜 챙겼는지 기억 안남), 속옷, 양말 2컬레, 카고바지, 면티1장, 가디건, 책1권, 국내전도, 메모장, 펜
  • 복장 상태 : 모자, 청바지(헉..ㅡㅡㅋ), 스니커즈 운동화(………), 면티, 셔츠1, 셔츠2, 베낭
  • 예상 일정 : 구례구행 막차-새벽녘 구례구 도착-지리산 등반-노고단 일출-하산-화엄사

절대 등산을 위한 상태가 아니었죠! 그래도, 어쨌든 훌.쩍.떠.나.기.로 했으니 최소한의 장비(?)와 복장만으로 떠나기로 하고, 저녁 7시경에 용산역으로 향했습니다..^^

‘온통 익숙한 것들이 아닌, 온통 낯선 것들. 현재가 소중함을. 내가 가진 것이 소중함을 기억해내기 위해.’

용산역. SPACE9으로 바뀌고 처음 가봤습니다..(^^;;) 대합실이란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외국 공항처럼 아~주 높은 천정에 깨끗한 시설들로 바뀌었고, 서관과 동관 사이에는 노천카페가 있어서 제법 운치도 있더군요. 역시 당연히 이런 곳에는 애정행각이 드글댑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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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인가. 용산역 완전 좋아졌는데.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 둘만 보이는 사람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남겨두고, 얻으려 그리고 버리려 떠나려는 사람들. 그저. 산속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미치도록 보고싶을 뿐인걸.’

용산역에서 구례구(지리산 화엄사 코스의 경우) 가는 열차편이 제가 갈 때는 21:45분 차와 22:50분 차가 있었는데, 지금 검색을 해 보니 평일에는 18:50분이 막차네요. 대략 무궁화호를 기준으로 4시간 30분 가량 소요됩니다. 용산역의 주변을 둘러보고(약간 코엑스몰 분위기가 물씬 나는), 대략 사람이 제일 적은 식당에서 저녁을 때우고, 그렇게 시간에 쫒기지 않으며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니, 정말 내가 어딘가로 가려고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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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45분.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들어오고, 참 오랜만에 혼자서 떠나는 여행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Look, if you had one shot or one opportunity. To seize everything you ever wanted. One moment, would you capture it? Or just let it slip?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노래.’

여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무엇을 담아오기 위해서, 무엇을 털어내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꼭 많은 의미를 붙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한 일들, 안타까운 일들, 속상한 일들, 많고 많은 일들이 우리 일상속에 있기 때문에, 어디론가 ‘나’를 모르는 곳으로 향해서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 얽힌 끈들을 잠시 잊으려고 하는건 아닐까 합니다. 꼭 비우거나 채우지 않더라도 말이죠.

‘어느 할머니가 자리를 바꿔달라셨다. 시퍼렇게 젊은 놈한테 꼬박꼬박 존대를 하신다. 자리를 옮겨드리고 10분쯤 지났을까. 바꿔드린 자리로 할머니께서 애써 찾아오셨다. 자리는 잘 찾았는지 궁금하셨다며. 또 그렇게 존대를 하신다. 시퍼렇게 젊은 놈한테 쓰신 그 마음이 그냥 마음에 걸린다.’

‘법정 스님이 조용한 새벽기차 여행에 동행해 주셨다. 언제나 깊은 울림을 전해주신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 지천을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다. 굳이 올곧이 정돈하고, 정리하지 않더라도 톡톡 튀어나오는. 서울의 술취한 하늘 아래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설레임이다. 곧 다른 설레임을 향하고 있다..’

서울을 벗어나, 안양, 수원, 천안을 거쳐 새벽을 달립니다. 높은 곳에 오르고 싶다던 생각이 결국 짧은 여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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