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적이 있었다. 진심이라는 가슴 안에 있는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전혀 다른 상황과 다른 마음인 척 슬쩍 내비치는 말로 진심을 대신하던. 첫눈에 사랑이라고 믿기도 하고, 오랜 편안함이 사랑이라고 믿기도 했던. 어쩌면 지금 하지 않으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큰 후회를 할 것만 같다고 여기며 사랑 하나를 위해 다른 많은 것들을 버리거나 놓치기도 하던. 그래서 돌아서서 후회하고, 뒤바뀐 상황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벗삼아서 지내던 사랑에 어리고 여린 날들이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런 날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의 제목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억하기 어렵다. 왜 호랑이와 물고기라는 잊어버리기 쉬운 단어들과 조제라는 단어들로 제목이 이루어졌는지는 두 연인의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야 슬쩍 눈치를 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보통 성장기 영화로 슬쩍 이해해 버리기고 그런 분류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둔다면 많이 서운해 할지 모르는 영화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헐리웃의 잘 짜여진 감동 또는 슬픔으로 이어지지 않고 일본 멜로 영화 특유의 이상한 여운을 남겨준다.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밀고 당기는 비현실적인 상황극이 없어서일까. 오히려 조제의 담담하고 시니컬하고, 때로는 당돌한 대사들이 사랑에 서투르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아련한 공감을 불러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왜 이들이 사랑을 하게 되고, 왜 헤어지게 되는지에 대한 입아픈 설명들이 없기 때문에 남겨지는 여운들이 기억되는게 아닐까.
누구나 사랑을 하고,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살면서 이따금씩 혹은 자주 겪게 되긴 하겠지만, 모두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변명은 각양각색이다. 성격이 맞지 않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오해가 생기거나, 잦은 서운함이 쌓이거나, 대화가 없거나 등 이유는 다양하다. 결국 사랑에 미치는 행복한 시간적인 추억들이 점점 쌓이게 되고, 서로에 대한 많은 것들을 기억하게 되면서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익숙함이 되어버린다. 그런 익숙함에 누군가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며 사랑이 가슴에서 빠져나갔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츠네오는 조제와의 사랑이 더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한줄의 담담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아름다운 다른 후배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조제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등에 업은 조제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그는 조제에게서 도망쳤노라고 말한다. 그의 무덤덤한 이별에 ‘뭐야 이거’라고 내심 놀랬으면서도, 조제와 헤어지고 나서는 길에서의 모습에서 여린 혹은 아픈 사랑에 대한 아련함이 잔잔하게 느느껴진다. 가버리라고 말하고 이내 돌아서는 그를 책망하던 조제의 모습을 보면서, 쿨한 척하고 떠나고선 사랑이 빠져나갔음에 멈춰버린 츠네요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더는 아프지 않은 아련함들을 떠올렸다.
길을 가다 흘러나오던 노래 하나에도, 사진 한장에도, 그 사람의 말투에도, 함께 마셨던 커피 한잔에도 가슴이 욱신거렸던 나였는데, 신기하게도 무모했던 20대의 사랑을 보내고, 냉정하고 담담한 30대의 사랑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제 어른이 된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 때의 조바심과 그 때의 어리석음, 그 때의 순수함과 그 때의 어설픔, 그 때의 떨림과 그 때의 설레임. 앞으로 살면서 그런 감정들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