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0일간의 여행
벌써 34개월이 지났다. 그야말로 엄청난 폭풍 성장. 뭐든 혼자 해 내려는 의지가 강해졌고, 자아를 투영하는 역할놀이에 빠져있으며, 낯선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낯가림과 부끄러움이 심해졌고, 말할 수 없을만큼 고집이 세졌고, 흔히들 말하는 ‘미운 네살’이 되었다. 하루 하루 커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지만, 그만큼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려서인지 우리가 기억하는 수 개월 전 보다는 덜 웃고, 덜 표현하고 더 많이 짜증내고, 더 많이 싫다고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함이 늘어가고 있다.
변화된 말하기
이제 대부분의 말하기는 단어 조합의 수준을 넘어서 대체로 긴 문장을 이야기할 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조사와 부사를 섞기도 하고, 적절한 형용사를 넣어서 감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슬슬 어록이 등장하기도 한다.
나 :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말을 걸면)
녀석 : 나 지금 집중하고 있잖아!나 : (어떤 상황에 대한 질문을 해서 이렇게 되물어 보면) 왜 그런걸까?
녀석 : 그러게…나 : 아빠 회사에서 울었어.
녀석 : 왜? 사장님이 뭐라 그랬어?
나 : 으응?나 : 아빠는 이거 없는데, 이거 베이비가 사줘.
녀석 : 알겠어. 엄마. 베이비 돈 줘.
그리고, 시작된 그 시즌! 바로 그 시즌! 왜! 왜! 왜! 왜! 최소 4단 콤보로 왜를 시전한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단어나 문장들, 그리고 그 단어들을 또는 상황들을 왜라고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물음에 와이프와 나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대답해 주고는 한다. 녀석 나름대로 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왜는 계속 시전된다. 처음에는 한두 단어, 문장으로 해결했다면, 이제 우리는 굉장히 길게 그 왜에 대한 답을 이야기해주게 된다.
나 : (섬집아기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데)
녀석 : 엄마가 왜 굴 따러 가요? 왜 아기만 혼자 남아서 집을 봐요? 바다가 왜 노래를 불러줘요? (등등등)
심화된 역할 놀이

녀석이 조금 더 어렸던 두살 즈음에 보여주었던 영상들, 백설 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 공주, 미녀와 야수, 라푼젤의 미디어적인 충격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지, 매일 매일 하는 역할 놀이 중에 하나가 공주 놀이다. 대부분 본인은 공주 역할을 하고 아빠 또는 엄마는 상대방(대부분 왕자. 가끔 사냥꾼 마녀 등) 역할이다. 백설 공주의 경우에는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는 씬,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물레의 바늘에 찔려 쓰러지는 씬, 인어 공주는 왕자가 탄 배가 난파되서 왕자를 구하는 씬, 라푼젤(원작이 아닌 디즈니 버전)은 플린과 처음 만나서 플린을 때리거나, 고델이 플린을 탑에서 미는 씬(이건 원작 버전인데 등장 인물의 역할들을 바꾼 버전), 본인은 웬디이고 아빠가 피터팬, 엄마는 팅커벨과 같은 역할 놀이가 주를 이룬다.
문제는 이걸 매일 한다는거다.(-_-;;) 그것도 아예 녀석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지금 웬디야’라고 이미 자아를 웬디로 바꾼 상태이거나, ‘나는 지금 벨(미녀와 야수 여 주인공 이름)이야’라고 갑자기 자기 정체성을 확 바꿔버리는거다. 따라서, 하루에 본인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가 않다는거다. 근래에는 엠버(로보카 폴리 등장 인물)가 대세여서 집에서 자주 불이 난다거나, 아픈 사람이 생긴다거나 이런 상황극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본인의 자아로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또 본인의 이름을 부르며 롤체인지가 되었다고 알려주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위에 열거된 책, 미디어 등에서 나온 대사들을 표정까지 몰입해서 몇 개나 되는 임팩트 있는 대사와 장면들을 흉내낸다는 것. 걱정된다거나, 불안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함께 하고는 있는데, 그래도 와이프나 내가 녀석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키우고 싶은데, 공주류의 책이나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는 대부분이 왕자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살아남거나 어려움을 피해가는 설정이라 행여나 인격적인 부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건 아닐까 하는 고민은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반복과 집중되는 영상 시청의 변화
위의 역할놀이가 여기서 파생된 부분이겠지만, 녀석은 대부분 반복학습에 길이 들어 있는 듯 보인다. 봤던 걸 또 보고 또 보는데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고, 대신 이전과 다른 부분이라면, 이전에는 그냥 보기만 했다면, 지금은 대부분 어떠한 설정과 상황들을 우리에게 묻는다.
엄마. 폴리는 왜 출동해? 왜 공주가 아파요? 플린이 왜 도망가요?
이야기를 그냥 따라간다기 보다는 이제는 어느 정도의 인과 관계를 토대로 이야기를 맞추어 나가는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인과 관계가 생긴 이야기들은 이제 제법 책이나 미디어를 틀어주지 않더라도 혼자서 말로 구현 동화 수준으로 이야기를 해 준다. 어린이 집에서 애기들을 모아 놓고 공주 이야기들을 들려준다고 한다…
핑크퐁이나, 다른 애니메이션들을 간간히 보여주기도 하고, 아예 주말은 일어나자 마자 1~2시간은 보게 해 줬었는데, 사실 핑크퐁과 같은 영상들은 사실상 유아가 보기에는 너무나 자극적인 부분이 많다. 화면이나 장면 전환도 너무 빠르고, 컬러도 대부분 원색 계열에 임팩트가 있는 움직임이 대부분이다 보니 당연히 아이들은 쉽게 몰입되는 경향을 보인다. 어른이 봤을 때는 유치하고, 단순하지만, 이제 만 3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정말 그야말로 신세계인 셈이다. 그래서겠지만, 많은 부모들이 외식을 할 때 또는 집에서 밥을 먹일 때 조금 더 쉽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대부분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여주면서 밥을 먹이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이맘 때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게 이제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밥을 먹여야 하는 상황을 정말 이해는 하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힘들지만 영상 없이 식사를 마치게 하고 있다. 어차피 녀석의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녀석의 개인 미디어가 생기면 막을래야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미디어에 노출을 최대한 자제하자고 한 우리의 미디어에 대한 보수적인 약속은 적어도 아직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타 놀이의 변화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놀이는 참 다양하게 접근해 왔는데, 근래에 역할놀이에 심취해 있다 보니, 그리고 우리도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덜 하게 되다 보니 어떤 방법적인 놀이가 줄어든 부분은 사실이다. 역할 놀이, 호비 장난감 놀이, 그림 그리기, 레고 놀이, ABC/가나다 글자 놀이, 책 읽기, 화장 놀이, 색종이 놀이, 찰흙 놀이, 블럭 놀이 등 여전히 많은 놀 거리가 있지만, 뭐랄까 조금 집중되는 것들이 보인달까. 다르게 생각하면 놀이가 점차 학습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으면 하는데, 이 놀이가 주는(적어도 부모와 함께 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하루에 그리 길지 않다 보니(길어야 2~3시간?) 녀석은 놀이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수면 시간이 줄어들고 잠드는 시간이 수 개월 전에는 9시 근방이었으나 지금은 훨씬 더 늦어지고 있다.
녀석이 생각하기에 놀이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점점 더 투정과 짜증을 내게 되고, 수습아닌 수습을 하다 보면 또 시간이 늦어지고. 매일 매일 웃는 모습을 실물로 보는 시간이 줄어듦이 와이프와 내가 가장 속상해하고 아쉬워 하는 부분이다. 계속 함께 놀고 싶어도 부모에게 시간은 늘 한정적이고, 아이에게는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자아와 이성적인 판단이 늘어감에 따라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느껴질테 내일이, 다음 달이, 내년이 또 더 걱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답이 없다
정말 정답이 없다. 이제 34개월이 지났는데, 주변 또래를 보면 이래라 저래라 말도 참 많고, 그냥 바라만 보기에도 덜컥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부모가 육아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키우지 않는 한, ‘내 아이’는 더 흔들리게 마련이다.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부모가 똑 같겠지만, 그런 좋은 것들은 다양한 상황에서의 투자가 수반되어야 한다. 꼭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교감하는 것이 바로 유아기에 우리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나의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정답이 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키우는 육아에 대한 철학이 나의 정답이 될 수 없는 것 처럼, 지켜보고, 격려하고, 그리고 함께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