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성장과 변화 – 1,210일

1,210일간의 여행

생후 40개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녀석은 여전히 무럭 무럭 성장하고 있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서 다니던 어린이집을 퇴원하고, 놀이학교로 옮겼으며, 작곡가로 키워보고 싶다는 내 바램을 담아서 음악학원엘 다니고 있으며, 영어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지능 검사를 마쳤으며, 그간 잠잠했던 4살의 히스테리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엘사 공주는 머리를 묶지 않는다며(사실은 묶는다…) 집에서는 무조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다.

또, 어떤 input으로 각인된건지 모르겠지만, 드레스와 치마만 고집하고 있으며, 감정 뿐만이 아니라 상황 연출에 대한 몰입도는 더욱 깊어졌으며, 자신은 아기가 아니라 언니라는 자부심에 푸욱 빠져있고, 그림 보다는 만들기에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감정은 더욱 풍부해졌으며, 낮잠을 잘 못자서 그런지 그만큼 짜증과 떼도 늘었고, 잠깐 어두워졌던 표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 밝아졌다.

녀석에게는 매일 매일 폭풍 같은 뇌세포의 빅뱅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의 삶에도 매일 매일 작은 언덕과, 한 고비 넘기면 다시금 일어나는 일상의 빅뱅을 준비하고 있다.

역할 놀이의 변화

녀석이 가진 컨텐츠는 대부분 역할놀이다. 몰입도가 조금은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주놀이(백설 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 공주, 라푼젤 등)를 좋아하고, 폴리와 옥토넛을 좋아한다. 공주 놀이의 경우, 녀석은 늘 공주 역할이고, 나는 늘 왕자 역할이다. 이 놀이가 장기화될 수록 이런 역할 놀이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점점 더 파악하기가 어려워지는데, 폴리와 옥토넛 놀이의 경우에는 캐릭터들의 다양성 때문인지 ‘주인공’이 아닌 보조 캐릭터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공주 놀이의 경우의 대부분의 서사는, 공주가 위험에 빠지고, 왕자가 구해주는 등이 주를 이루고, 여전히 하나의 스토리를 3~4회 이상 반복해서 하는 걸 좋아한다. ‘한번 더!’는 여전히 외친다. 

이 역할 놀이는 내가 집에 도착해서 현관 문을 열면서부터 시작되고, 잠들기 바로 전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녁 밥을 먹는 것도, 샤워를 하는 것도 모두 녀석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간신히 할 수가 있다. 퇴근 하면 온전히 녀석에게 몰입하겠다는 나의 다짐도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역할 놀이를 베이스에 깔고, 다른 놀이를 해야 하고(하기도 하고), 밥을 온전히 가족과 대화하면서 먹는 일은 사실상 손에 꼽을 정도다. (나와 와이프가 저녁을 마실 때가 제일 불쌍하다…)

다만,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 염려되는 부분은 녀석은 ‘놀이’에 집중된 대사를 많이 한다는거고, 다시 말해 일상에 대한 녀석의 ‘감정’을 나에게 들려주는 경우는 많지 않은 편이다. 즉, 녀석은 나와 ‘머리’로 하는 놀이와 대화에 익숙해져 있고, 엄마와 ‘가슴’으로 하는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주말에 또는 나와 단 둘이 있는 경우에는 자기의 생각이나, 일상에 대한 이야기(물론 아직은 긴 문장 보다는 간단한 현상에 대한 감정 표현이지만)를 역할 놀이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닌, 평상 언어로 하기도 한다.

영상 시청의 변화

우리는 녀석을 키우는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관으로 삼았던 다짐을 하나 했었다. 절대로 식사 시간에 휴대폰에 있는 영상을 보여주면서 밥을 먹이지 않는 것. 40개월 가까이 동안 와이프와 나는 그 다짐을 충실히, 고집스럽게 지켰고, 덕분에(?) 우리는 주말에 함께 하는 식사 자리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자리가 되었다.

외식을 나가면 아이가 있는 테이블의 거의 90% 이상은 휴대폰을 세워 두고, 유튜브 영상이 켜진 채로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아이의 눈은 작은 스크린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형형색색의 미디어 컨텐츠를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보고 있고,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 아이의 입에 한숟갈, 두숟갈 밥과 반찬을 구겨 넣는다. 고지식한 생각의 발현이지만, 나는 식탁에서는 즐거운 대화가 오가기를 희망한다. 각자의 스크린을 보며 스크린 안에 있는 다른 세상을 탐닉하는 것 보다 지금 둘러 앉은 식탁에서의 오늘의 대화가 훨씬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런 우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식사 시간은 고달픈 설득과 쇼부의 향연이다. ‘이거 잘 먹으면 뭐 줄께’와 같은. 아직은 그게 통한다… -_-;;

하지만, 주말 티비 시청은 여전히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아침 시간 또는 짬이 나는 오후 시간 아니면 저녁에 1시간이 좀 안되게 녀석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본다. 호비로 시작되었던 영상 시청이, 디즈니 공주 시리즈로, 폴리로 옥토넛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슈퍼윙스까지. 몇 개를 볼 건지 사전에 합의하고 영상을 시청하면 녀석은 꽤나 잘 지켜 준다. 알아서 끄기도 한다. 제법 익숙한 장면이 나오면 ‘아빠, 불쌍하다, 그치?’를 내 뱉기도 하고, ‘하아… 안되는데…’ 하는 감탄사도 자주 내 뱉는다. 고맙게도 떼를 쓰거나, 짜증을 내면서 더 보겠다고 울어 제끼는 일은 녀석은 하지 않는다. 사실 생각해 보면 녀석이 떼를 쓰는건 오직 하나. ‘더 놀자! 더 놀자! 더 놀자! 쬐끔만, 한번 만 더. 더. 더. 더…’

말하기 커뮤니케이션

보통 퇴근 후 약 1시간 30분 가량은 나는 녀석과 놀이를 한다. 그리고, 잠들기 약 10분 가량은 녀석과 와이프는 그날의 일상을 대화한다. 말하는게 아니라, 이제는 사실상 대화를 한다. 사고의 방식도 늘었고, 어휘도 급속하게 늘었다. 사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녀석은 엄청나게 신기한 문장, 단어들을 쏟아낸다.

나 : 우리 블럭놀이 하자!
녀석 : 아빠. 나 지금 집중하고 있잖아!

녀석 : 나도 서울 살고 싶다.
나 : 왜?
녀석 : 서울이 좋으니까.

나 : 엄마랑 호비 고를래?
녀석 : 싫어!
나 : 왜 엄마를 미워해?
녀석 : 엄마를 미워하는게 아냐. 아빠랑 고르고 싶은거야

이모 : 엘사 드레스 예뻐. 그런데 엘사 드레스 보다 예쁜게 뭔지 알아?
녀석 : 응. 나! (사실은 자기 이름 3음절을 말했다.)

녀석 : 저희 엄마는 둘째 이모랑 놀러 갔어요.
녀석 : 그런데 두 밤 자고 와요.
녀석 : 그래서 어제 아빠랑 키즈카페 가서 놀았어요.
녀석 : 엄마는 두밤 자기 때문에 내일 와요.
녀석 : 어제 아빠랑 잤어요. 오늘도 아빠랑 잘거에요.
녀석 : 할머니는 어제 좀 쉰데요. 그래서 키즈카페 안갔어요.
녀석 : 엄마 보고 싶지만 두밤 자고 오기 때문에 괜찮아요. 제 말이 다 맞아요.

이모 : (집에 비데 수명이 다 되어서 새로 갈았는데….)
녀석 : 이거 바꼈네요?

녀석 : 선생님이 혼내주고 먹는 건 정말 싫어. 어린이집에서 먹는 건 너무 싫어.

엄마 : 피곤해?
녀석 : 응. 오늘 잠을 안잤거든.

나 : 편의점에서 뭐 사줄께.
녀석 : 응
나 : 뭐 먹고 싶어?
녀석 : 내가 고를께

엄마 : 내일 엄마가 놀이학교 데려다 줄께. 내일 엄마 회사 안가도 돼.
녀석 : 왜? 사장님이 늦게 와도 된데?

(새로운 놀이학교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엄마 : 여기 어때, 좋은 것 같아?
녀석 : 응. 좋은 것 같아.
엄마 : 정말 좋은 것 같아? 어린이집 안가고 여기 가면 좋을 것 같아?
녀석 : 엄마. 나 여기 갈꺼야. 여기 가게 해줘.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거 하게 해줘.

(이날 와이프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흐느껴 울었다…)

상황을 표현하는 것도,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것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이제는 꽤 높은 수준의 대화가 사실상 가능해졌다. 심지어는 묵혀두었던 자신의 생각을 나중에 털어 놓기까지 한다. 녀석의 감정을 이제서야 알아챈 우리는 녀석의 말 한마디 두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날도 더러 있었고, 생경한 표현과 문장 특히 우리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을 문장 속에 포함시켜서 말을 할 때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아이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부모에게는 성장에 대한 오판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녀석이 말을 잘 하고, 또 상대방이 던진 말에 대한 반응을 말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종종 녀석이 고작 40개월도 채 안되었다는 사실을 잊고서 녀석을 훈육하는 모습에 우리 스스로가 놀라기도 한다. 고작 생후 3년된 애 한테 말이다. 울며 떼를 쓰는 여느 4살짜리 아이와 똑같은건데, 나는 녀석을 세워 놓고, 옳고 그름과, 잘못과 반성 그리고, 책임에 대한 훈계를 늘어 놓는 날도 많아졌다. 고작 3살짜리한테 말이다. 

그리고, 지능 검사

와이프의 호기심과도 같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확인 받고 싶었던 우리의 육아 방식과 그로 인한 우리의 output(녀석)이 어떤 수준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었던 와이프는 녀석의 지능 검사를 예약했고, 그날 나는 녀석과 함께 실험실(….)로 향했다. 병원의 로비(거실)는 몇 가지의 놀이 도구가 있었고, 20분 가량 나는 녀석과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 방으로 들어가서 ‘아이가 1시간 가량 아빠와 떨어질 수 있나요?’라고 물었고, 나는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이내 녀석에게 놀이겸 검사겸 대화를 시도했고, 내가 살짝 자리를 비우고 나자, 녀석은 나를 찾지 않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녀석의 검사결과를 가지고 원장 선생님은 거의 1시간을 넘게 녀석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나는 사실 그저 멍 한 상태로 몇 개의 단어와 몇 개의 문장만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나머지 수 많은 단어들은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흘러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혹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것들에 대한 녀석의 이야기들. 하루 하루 넘겨야 하는 언덕과도 같은 날들이 또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어떤 숫자와 어떤 패턴들이 하얀 종이에 적혀있었고, 와이프와 나는 그 결과지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또 많은 정보를 찾기 위해 여기 저기 검색하고, 녀석과 비슷한 또는 같은 유형의 검색어에 해당되는 게시물을 보면서 또 많은 생각이 이어졌다. 이제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부터 우리가 하는 선택들이 녀석의 수 많은 갈림길 중에서 옳은 또는 녀석에게 맞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 더 나은 길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리만의 ‘결핍’을 안고 녀석에게 지금처럼 이렇게 함께 살아가면 되는걸까? 와이프와 내게는 마음 한 구석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무게의 책임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우리의 가치관

나는 내가 살아왔던 환경이 지금의 나를 지배한다고 믿는다. 내가 가진 선천적인 또는 운명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매일 매일 글을 쓰고, 매일 매일 글을 읽고, 다음을 걱정하고,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한 무언가를 하는 것 처럼 내 몸에 익숙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의 소심하고세심하고, 어둡고, 진중하고, 어쩌면 그래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녀석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녀석에게는 그런 모습의 아빠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수 많은 날들을 웃어왔다. (물론 화를 내고 짜증 내는 날들도 많다.)

다행히도, 녀석은 밝고, 명랑하고, 수다스럽고, 감정이 풍부하다. 어린 시절에 너무 많은 결핍 때문에 아파하던 나의 시간들을 보상 받는 것 처럼 녀석은 맑다. 그런 녀석을 만나는 매일, 우리는 날마다 기준이 되는 가치관을 하나 둘씩 세우며 살고 있다.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녀석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날들을 만들어 주기 위한 가치관들일 뿐이다. 거창한 목표나 거창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저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한 장의 사진처럼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우리가 만든 기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녀석은 우리와 함께 1,210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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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성장과 변화 – 1,210일

거창한 목표나 거창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저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한 장의 사진처럼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녀석은 우리와 함께 1,210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