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솔직히 첫 접근은 호기심이었다. ‘습성’이 아닌 ‘습속’이라는 어딘지 듣기 거북한 단어를 끄집어 내는 선배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한 첫 번째 이유와 함께, 아프다 못해 날카로와서 친하고 싶지 않을 법한 사람, 진중권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하게 불편함이 오히려 책을 읽는 초반에 나를 불러서 ‘너도 삐딱선을 한번 타봐. 세상이 다르게 보일꺼야’라고 자꾸 부추기는 듯 해서 거북했다. 따뜻한 비판과 차가운 비판을 택하라고 한다면, 그래도 무지의 인간을 계몽(?)시키려는 목적에 부합되기 위해 따뜻한 비판을 택하려는게 나일 것이다. 김규항님의 글이 전해지는 느낌은 그러한 ‘따뜻함’에 기인된 것이라면, 진중권님의 글은 ‘냉정함과 날카로움’에 기인된 부분이다. 당췌 뭐가 그렇게 삐딱하신 것일까?
근대화|프랑켄슈타인 – 낯선 근대인을 만나다
전근대성|죽은 양반의 사회 – 미완의 프로젝트
미래주의|디지털, 사이보그 그리고 짝퉁 – 테크네와 메트릭으로 무장하라
국민성, 정체성 말고, 습속(Habitus)이라고?
이건 참 지금도 설명하기 어렵다. 정체성이 아니라신다. 국민성도 아니라신다. 한국인의 현재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잣대가 국민성이나 정체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게 아니라신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아. 어렵다. 그런데, 이런 식이시다. 산업화를 거쳐온 자본주의의 노동과 계급, 기계화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군대화를 통한 근대화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펼쳐보인다. 역시 눈에 띄는 문구.
내가 사는 아파트 옆 학교에서는 아직도 조회를 하는 모양이다…(중략) 교장은 사단장, 선생들은 연대장, 학생들은 병사. 어떻게 보면 2차대전 중의 포로수용소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학생들은 포로, 선생들은 간수, 교장은 수용소장.
꽤 많은 시간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고 전복시킬 수 없을까를 고민하곤 했었지만, 결국 살아가기 위한 시간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 안에서 살고 있는 나로써는 참 ‘잔소리’가 듣기가 싫은가부다. 그럼에도 바로 대한민국이 겪였던 급변한 사회과정이 어떠한 ‘속성’을 갖는다는 생각은 사실 많이 회자되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오랜 농경사회를 지나고, 커다란 전쟁과 전란을 겪고 급격한 산업화와 군부정권의 집권 등으로 이어진 역사이기 때문에 갖는 특성이 사회적인 상황에 따른 환경적응이지 그것을 국민성으로 놓고 볼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일까. 여전히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부분이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갈 수록 평소 삶에 있어서 가치로 삼고 있지 않는, 혹은 이래서는 안된다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공감을 하게 만든다.
콕 찝어 갈구기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특질은 전사기질이 아니다. 근대화와 군대화가 만들어 낸 과거의 경쟁력일 뿐이다. 감각과 상상을 배격하고, 정념을 다스려라.(황우석 사태의 맹목적인 헌신적인 믿음의 예), 과시를 위한 의례와 체면의 문화, 생떼를 부리는 아이에게 관대한 한국의 엄마들, 치맛바람과 규칙 파괴의 시범을 통한 아이들의 세상에 나가는(출세) 의미의 부조화와 그들의 사고 및 가치관의 염려’ 등에 대한 내용은 널리 읽혔으면 하는 텍스트들이 많아 읽는 동안 훔… 하는 여운의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특히나 이 책을 추천했던 선배와의 대화에서도 짜증을 내며 묻기도 했던 부분이기도 했지만, 잔뜩 허영을 머금고 보기에 불편해 지는 키치 문화에 대한 지적.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찍어 올려대며 나를 다른 존재로 각인시키려는 행동들. 신체의 자본화를 통해 이어지는 예술이라는 이름이 미간을 짜증나게 찌푸리게 만드는 코드. 참을 수 없는 부분들 중에 하나다. 허영이라는 부분이 상업과 만나고, 다시 그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어 표현되기도 하고, 대중성이라는 의미로 인기를 받기도 하는 세상의 무게가 참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적 허영, 신체적 허영, 브랜드/계급의 허영들은 이미 사회 깊숙하게 뿌리밖혀 있어서 백날 사회활동 해 봐야 답 안나온다. 이미 자본주의의 산물인 돈에 대한 가치가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더 높기 때문에 ‘내’가 먹고 있는, ‘내’가 즐기고 있는,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타인에 의해서 계급과 가치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키치문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훨씬 크겠으나, 나에게 키치라는 단어는 허영과 동일한 친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어쩌자고?
에필로그의 타이틀이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이다. 처음에는 이게 먼 쌩뚱맞은 결론인가했으나, 오랫동안 가치로 삼아왔던 텍스트가 뿅뿅 튀어나와서 또 한번 훔… 하게 되었다.
생태계의 변화에 적응하려면 신체를 늘 어느 쪽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제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시에 다른 영역들에 대해 폭넓은 식견을 가진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유목으로 내몰릴 때에 제 분야를 신속히 다른 분야와 ‘접속’하여 필요한 기관으로 새로이 분화할 수가 있다.
다양하고, 폭 넓은 시각을 갖고 오늘과 내일을 살자는 의미로 하면 너무 단순할 수 있겠으나, 민족성이니, 국민성이니 따위의 사고 보다는 오히려 변화하는 세상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식견을 갖자로 볼 수도 있는 내용이다. 뭐. 그렇지 않은가? 과거에 ‘나’는 어떠했을지라도 내일의 ‘나’를 만드는 일은 바로 오늘이기에 말이다.
+ 더 좋은 글 읽기 : http://blog.naver.com/zorg2210/40057296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