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신문 기사를 보니, 35살이 되면 ‘살아온 세월=살아갈 세월’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고 한다. 대략 달리고 있는 추세를 보니 아직은 살아갈 세월이 조금은 더 긴 듯 한데, 뎅쟝… 오히려 사고의 폭과 깊이는 ‘살아갈 세월’에 대한 깊은 고민 보다는, ‘살아온 세월’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이루지 못했다는 조바심이 더 앞서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살아온 세월’ 동안 ‘살아갈 세월’을 그리기 위해서 어떤 영웅을 모델로 삼아본 적이 그리 없었다는 사실이다. 新세대, X세대, VIDEO세대, MTV세대로 문명의 온갖 이기들을 누려왔고, ‘개방’과 ‘선진 문화’라는 이름의 다양한 문화를 처음으로 탄력적으로 받아들였던 우리네 70년대 세대는 분명 386세대나, 우리네 부모님 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누린 세대임은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 대학교 때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주의’, ‘자유’를 외치며 총포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던 그들의 세대에 견주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세대는 가벼워진다.

이제 ‘데모’의 선두에서 혹은 사수대의 무리속에서 이름없이 싸우던, 온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던 그런 ‘영웅’의 세대는 잊혀지고(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숱한 영웅들이 숨쉬고 있지만), TV와 온갖 미디어속에서 웃기고, 울리는 연예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차지해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나’라는 인물이 억척스러운 역사속에서 그자리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렵다. 과연 어떻게, 어느 자리에서 살아남았을까 하는 그저 쓸데없는 고민은 결코 앞서 가지 못하는 영웅이 될 수 없었으리라는 확신 때문에 그리 길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유아 때부터 체험한 우리는 주어진 자유와 문명, 기계화, 디지털화로 인해서 점점 더 빠르고, 쉽고 편한 것들을 찾으며 살아와서일까. Radio가 아닌 TV는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절대적인 통신수단이 되었으며, TV에 나오는 광대는 점점 더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우상이 되어갔다. 다음 세대로 갈 수록 연예인에 대한 호감도와 우상성은 커져가고, 그들을 모르면 아웃사이더가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물론, 현 세대를 ‘Radio, 책:Video, Internet=진중함:가벼움’과 같은 절대 대치의 관계로 볼 수는 없지만, 자꾸만 나는 느린 것과 빠른 것, 가슴과 머리로 이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우리 세대에게 황우석이라는 영웅이 등장했다. 대한민국에도 드디어 세계가 우러러 볼 수 있는 ‘영웅’이 나왔다고. 자랑스럽다며 월드컵의 영웅들 이후에 대한민국은 또다른 영웅을 찾았다고. TV와 신문, 잡지, 인터넷 모든 미디어들은 ‘네티즌’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존재한다던 그놈의 ‘원천기술’은 점점 꼬리를 감추고, 우리의 영웅은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사기꾼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사실 나는 그를 믿고 싶었다. PD수첩이 진실을 캔다고 여기저기 뒤적뒤적 할 때도, 노성일 아저씨가 눈물의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래서 모호한 상황들이 점차 사기극으로 치닫고 있음이 눈에 보이고 있을 때에도 나는 황우석이라는 영웅을 믿고 싶었다.

그저 어설프고 맹목적인 애국심 때문이라 해도 좋았다. 50여년 전 ‘깁미 쪼꼬렛 플리즈’하던 무식한 동양인들 한테서 세계 초유의 기술을 빼앗겨버린 완전 깡패 코쟁이들이 ‘조때따. 늦었다. 뎅쟝’, ‘졸라 아쉽지만, 유 윈이다. ‘하는 존심 상하는 꼴을 꼭 한 번은 보고 싶어서였다.

너무 비약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볍고, 빠르고, 쉬운 방법을 살아온 우리들의 세대가 어쩌면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는 황우석을 너무 서둘러서 영웅의 자리에 앉혀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태극전사들 이후에 공석으로 남겨두었던 그 자리에 우리가 너무 빨리 앉히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다시금 공석으로 남겨진 그 자리에 오르길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新지식인 1호 심형래 감독이다. 카메라 뒤에서 진중하게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를 ‘영구’ 심형래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는 현재 뭍 사람들의 기대치 만큼 ‘잘 나가는’ 감독이 아니다. SF영화로 세계를 석권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포부를 가지고 그는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1993년 <영구와 공룡쭈쭈>를 시작으로 그는 ‘대한민국에서도 Well-made된 SF영화를 만들 수 있다’며 10년이 넘도록 외로운 꿈을 품고 영구아트무비를 이끌고 있다. 영화제작사로는 처음으로 ‘기술벤처기업’으로 선정되었고, 수 많은 혹평과 비난 속에서도 <용가리>를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헐리우드 메이져 배급사인 콜럼비아 트라이스타에 배급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들끓는 인터넷은 그의 영화를 헐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며 ‘수준 이하’로 낙인 찍어버리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 중의 한 명이었으며, 쓸데없는 예산 낭비와 시간 낭비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떠들석하던 ‘新지식인 1호’는 어느새부터인가 미디어와 네티즌의 입에서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고, 조금씩 그를 잊어갔다.

그랬던 그가, 라는 역시 괴수영화를 들고 올해 우리를 찾아온다고 한다. <용가리>의 비싼 수업료 때문이었을까. 현재까지의 의 일부 공개된 스틸컷은 상당한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퀄리티를 뿜어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IT강국답게 영상기술로는 이미 헐리우드에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양의 유구한 역사와 무한한 상상력을 맘껏 표현해 낸다면, 전 세계의 눈이 우리의 문화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 ㈜영구아트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문화 컨텐츠를 수출하는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되겠습니다.’ – 영구아트무비 CEO-profile 중에서

몇 장의 스틸 컷과, 몇 분 되지 않는 동영상으로 이제 그의 호언장담에 가슴이 설레면서도 동시에, 그의 호언장담이 제발 아무 때나 춤추는 미디어와, 수 많은 입방아들로 인해서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반지의 제왕>, <메트릭스>, <스타워즈> 등으로 이미 눈높이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버린 우리들의 입맛에 과연 얼마만큼의 달고, 깊은 맛을 내 줄 수 있을지가 너무나도 지극히 염려스럽다. 이제 코미디언 심형래가 아닌, 대한민국의 SF 영화감독 심형래로 남을 것인지는 올해 다시금 판명이 나겠지만, 난 또 그에게 ‘공석’으로 남겨진 자리에 오르시라고, 제발 그 자리에 올라달라며 혼자 속으로 ‘파이팅’ 하는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감흥 없이 누구나 지껄일 수 있는 댓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장 냄비 근성이 투철하며, ‘꺼리’ 만을 찾는 미디어의 앞서간 반응들로 인해서 그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 역시 그런 세대이지만, 적어도 ‘영구’를 기억하고, <우뢰매>에 환호했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꿈을 접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그를 여전히 ‘바보’라고 비웃고, ‘하던거나 해라’, ‘쉬운 길로 가라’고 말했던 사람들에게 이젠 정말 ‘영구는 없다’고 말해줄 통쾌한 기회가 오기를. 내 아들과 딸의 손을 붙잡고, 그가 만든 영화를 보려고 길게 늘어진 줄을 기다리며 ‘영웅’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기를…


sigistory

SF 영화를 좋아하고, 여전히 Lego에 빠져있으며, 그래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바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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