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다녀온지도 벌써 2주나 지났네요. 도착하자마자 글로 조금 남겨두고, 시간 되는대로 다시 산 나들이를 하려고 했는데, 역시 훌쩍 떠나기도 쉽지는 않은가 봅니다. 그래도, 봄날이 또 서둘러 사라지기 전에 한 두군데를 더 다녀올까 합니다. 분명 갑작스런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겠지요? ^^ 자. 화엄사가 좌측에 있고, 우측에 짧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노고단으로 오르는 코스가 보입니다. 삼거리라고 해야하나요? 여길 찍어서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깜박했네요..^^
화엄사->중재, 집선대폭포->코재, 무넹기->노고단. 약 7Km, 보통 4시간 정도 산행 거리. 미리 말씀드리자면 절대 무리하게 오르시면 안됩니다. 일단, 제 복장상태가 아래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결코 산행 복장이 아니었답니다. (뭐 급하게 훌쩍 떠났으니 당연한거지만..) 중턱 즈음 올랐을 때 절실하게 느껴졌지만, 산행을 위한 기본적인 복장은 갖추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노고단 정상에 오르면 휴게소가 있긴 합니다만, 역시 간단한 식사류와 산을 오르는데 도움이 되는 다과류(?) 정도가 꼭 필요합니다. 전 800원짜리 석수 한통 달랑 들고 올랐습니다..ㅡ.ㅡ
‘등반 초반. 산책로에 아무도 없다. 이 큰 산을 나 혼자 독차지한 느낌. 가볍고 가볍고 또 가벼워라. 즐거운 산행. 즐거운 시작.’
시간이 조금 애매해서인지 초입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질 않더라구요. 옹기종기 출발하려는 사람들의 무리로 왁자지껄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의외로 인적이 드문 정말 산길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미 혼자 시작한 여행이라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으니 더 마음이 가벼워지고, 정말 ‘산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확실하게 들던데요? ^^ 산을 오르는 내내 사진은 하나도 찍지 못했습니다. 4시간에서 4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는 이야기에 도시락도 못 챙기고, 조금 늦으면 내려와서 움직이는데 시간이 늦어질까봐 염려되서 (새벽에 캄캄한 산 입구를 본 뒤라서 더욱) 그냥 눈으로만 담기로 했습니다. 오르는 길 내내 친절하게도 여기저기 이정표와 지리산에 서식하는 동, 생물에 대한 정보들이 자세하게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지리산 반달곰이 나왔을 때 대처하는 요령 등도 있어서, (왜 초등학교 때 교과서나 동, 식물원 가면 보는 그런 일러스트로 된 만화 컷 같은..^^;) 조금은 천천히 초입을 올라갔습니다.
군대에서는 훈련 때마다 행군을 합니다. 더 길게 다녀오셨던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30~40Km를 장비와 베낭을 메고 걷습니다. 대부분 50분 걷고 10분 쉬고를 반복하면서 말이죠. 곤욕스러운건 한 여름에 아스팔트를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아스팔트의 기운과 합쳐지면서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을 정말 아무 생각이 없게 만들죠. 그때는 정말 어떤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냥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걸어갑니다. 산을 넘기도 하고, 아스팔트를 지나기도 하고, 민가를 지나기도 하고. 그때는 매어진 몸이었고, 지금 산을 오르는 마음은 내가 원한, 그야말로 사서하는 고생이니 오히려 산행이 즐겁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등반 중반. 즐거운 것만 생각하자. 즐거운 사람만 떠올리자. 즐거운 기억만 돌아보자. 그리고, 즐거울 일만 그려보자. 다 올라가려면 멀었나..’
중반 즈음 되니, 커플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동호회 처럼 보이는 5~6명의 단체도 보입니다. 아. 그런데, 갑자기 왼쪽 허벅지가 움직일 때마다 살짝 경련을 일으킵니다. 하도 운동을 안하고, 조금 장시간 움직였다고 왼쪽 다리가 시위를 하네요…ㅡ.ㅡ 이제 중간도 못 온것 같은데 참 난감합니다. 잠시 앉아서 주물러 보기도 하고, 여기 저기 스트레칭을 하면서 좀 풀어보기도 했는데, 말을 듣질 않네요. 이미 한 10분 가량 뒤로 제쳤던 커플들과, 동호회 사람들이 휙휙 지나갑니다. 별 수 없이 왼쪽 허벅지 살살 달래며 다시 오릅니다. 뭐 견딜만 했거든요..^^
‘등반 후반. 여기만 아니면 다 즐겁다.. 다리는 천근. 땀은 소나기. 생각은 無. 포기할까. 포기할까. 힘이 되준 아줌마 등반대. 사탕 두개로 노고단 오르다..’
이정표는 분명 노고단까지 2km, 1.5km, 1km 이렇게 줄어들고는 있는데, 500m 줄어드는 시간들이 정말 길게 느껴진답니다. 특히 코재(네이버에서도 노고단 코스의 하일라이트인 코재는 상당히 힘들다고들 합니다.) 주변에서는 보폭이 상당히 높은 돌 계단들을 올라야 하고, 땀으로 샤워를 한터라 살짝 지치고, 왼쪽 허벅지는 빨리 쉬게 해달라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아. 어리석고, 무모하고, 바보같고, 엉뚱한 산행이었다는 것을 이때 정말 후회했습니다..ㅡ.ㅡ 등산화가 있었겠습니까? 신고간 스니커즈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기진 맥진. 다리는 정말 천근 만근. 살짝 포기의 기로에 섰습니다..ㅡ.ㅡ 다섯 걸음 정도 오르고 쉬고, 다시 세걸음 옮기고 쉬고. 이러기를 반복하는데 아까 잠깐 마주쳤던 동호회 분들이 보입니다. 그분들 틈에서 잠시 쉬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사탕 두개를 건네주시더라구요.
“총각. 이거 드실라우?”
아시죠? 전 물 밖에 안가져왔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어서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는.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 사탕 두개를 번갈아 먹으면서, 하산 하는 어르신들과 애들(??)한테 ‘노고단 얼마나 남았나요?’ 묻기를 반복하면서(군대에서 선임병들이 하는 이야기랑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답을 해주는지.. – 죄다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되요….ㅡ.ㅡ) 어설프게 보이는 고지를 향해서 올라갔습니다.
‘노고단 도착. 아..’
올랐습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정상을 가자..는 아니었지만, 너무 쉽게만 생각하고 올랐던 그 길들의 끝에 다달았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이제 더 오르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니 정말 딱 오분전에 먹었던 온갖 힘든 마음과 몸이 금새 달아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그리고, 이제 눈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능선이 굽이치는 지리산.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벗과 둘이서, 혹은 여러명이서 함께 오르고 정상에서 저런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경험이지만, 홀로 오르는 산. 그리고 홀로 맞는 정상에서의 느낌은 그 보다 더 좋네요..^^
아.. 정상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사진이 참 많은데, 제 눈에 담아온 그 풍경들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잘 전달되고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아래 보이는 사진이 노고단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노고단은 제를 지내는 단이었다고 합니다.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이곳에서 절대신을 향해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많은 한을 담고 있는 지리산 끝자락이어서 더 의미가 깊게 느껴집니다. 뒤쪽으로 보이는 길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5월 초순까지 산불예방 기간으로 현재 입산이 통제되었습니다. 다음에 지리산을 다시 오를 기회가 되면 천왕봉에서 든든한 지리산의 기운을 맛 볼 수 있겠죠..^^
휴게소에서 핫바와 사이다로 시장기를 달래고, 운치를 느끼며 유유자적하고 나니 2시 30분 정도 되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이 서운하지 않게 초콜릿 과자도 잊지 않고 사두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려고 하니 이제서야 준비없이 올라온 제 꼴(?)이 확연하게 보입니다.ㅠ.ㅠ 산행 복장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 저 뿐이고, 더군다나 등산화를 신지 않은 무례하고, 무식한 사람은 저 뿐이더군요..ㅠ.ㅠ 정말 완전 챙피해서 하산의 길은 속보로 내려왔습니다..^^;; 하산 코스는 화엄사로 향하는 역 코스가 아니라, 노고단에서 성삼재로 향하는 길로, 조금 우회해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성삼재로 향하는 하산 길은 제법 길이 닦여 있고, 구례구에서 성삼재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시고 약 2시간 정도로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산행이 가능합니다. 이 코스는 산행이라기 보다는 천천히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오를 수 있는 산책로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삼재 휴게소 입구입니다. 화엄사-노고단 코스와는 달리 보시는 바와 같이 산행 복장이 아니더라도 산책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오르실 수 있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역시 무작정 내려왔더니 또 문제가 생기네요.. 성삼재에서 구례구 읍내까지 내려가는 버스가 없답니다..ㅡ.ㅡ 성삼재는 해발 1,102m. 여기가 다 내려온게 아니더군요..ㅠ.ㅠ 오히려 성삼재는 지리산 종주 코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삼재에서도 노고단에서 처럼 이렇게 기막힌 그림들이 펼쳐집니다.
여전히 내려갈 방법이 없습니다. 혼자서 셀카 한번 때리고 고민 때리다가, 대학교 1, 2학년 때 이후로 해본 적 없는 히치(!!!!)를 해서 내려왔답니다! ^-^ 다행히 마음 좋으신 커플(저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한테 접근해서, 읍내까지만 태워달라고 하고, 흔쾌히 동승을 허락해 줬답니다. 태워준 커플은 1년전에 결혼을 했고, 주말에 갑자기 지리산에 가보고 싶다는 남편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어제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 또 있네요..^^) 혼자서 저 역시 어제 와서 찜질방서 자고, 아무 것도 준비한거 없이 노고단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해 줬더니, 그냥 웃습니다..^^;; 그러면서 남편 분 하시는 말씀.
“혼자니까 더 쉽지~”
아.. 왜 맴이 아프져? ㅠ.ㅠ 여튼 고마운 두 분께서 친절하게도 구례구역까지 데려다 주시고는, 두 분의 남은 주말 여행을 떠나셨답니다..^^
무작정 지리산에 오르고 싶었던 마음이 그래도 거창하지는 않지만, 1박 2일간 온통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발로 뛰고, 묻고, 오르고 했던 즐거운 기억들이 남았습니다. 여러 해를 살아오면서 안해 본 것들 별로 없는데..라고 생각했는데, 기차로 남쪽 끝까지 내려와 본 적도 처음이었고, 혼자서 산에 오른 것도 처음이었고, 짧지만 1박 2일간 철저하게 혼자서 지내본 적도 처음이었습니다. 꼭 무언가를 버리려고, 또는 생각을 모으려고 떠났던 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버리거나, 혹은 담기 위해서 그 자리를 정돈할 줄 아는 마음은 생긴 것 같습니다.
지리산. 꼭 한번 오르세요. 빼곡히 꼼꼼히 채워진 계획으로 철저하게 오르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저 어딘가 잠깐만이라도 도시를 떠나고 싶으시다면, 지금 떠나세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아마 늦으실겁니다. 바로 지금 떠나세요…^^ 전 또 가려구요..^^
다음에는 더 즐거운 이야기를 들고 와야겠습니다. 처음에 페이퍼 쓰기 전에 했던 생각들이 지리산을 내려오면서 다 잊었나봅니다..ㅠ.ㅠ 그래도, 지리산만큼은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다 담아 왔으니 든든합니다. 그럼 또 다른 즐거운 여행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