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의 시선
사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아이들이 있으면 아예 들어가질 않았고, 아이를 안아주거나 놀아줬던 기억도 저에게는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엘리 정도의 나이에 10명 정도의 대가족으로 한집에서 살았던 저로써는 ‘삼촌’이라고 불리우는 몇 살 어린 조카들이 그 때는 너무 부담스럽고 싫었던 경험들이 저에게 눌려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늘 아이는 대화하기 어려운 존재였고, 눈높이를 낮춘다는 의미도 저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러다 보니 ‘내 아이’에 대한 일상이나 미래를 그려봤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가 나왔죠. 그것도 아빠가 되기에는 어쩌면 너무 ‘늦은 나이’에 말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린다…. 나는 다시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른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 – 마흔 중
누구나 그랬겠지만, 아이가 생기고 ‘변화’에 더욱 민감해졌습니다.
트랜드에 민감하다는 2030 입장으로 오래 살 것만 같았는데, 아빠가 되고나니 체감되는 변화들이 유독 많아졌습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도 퇴사하는 과정에서 심하게 병을 앓고, 그리고 두 번을 더 이직하고 나니 직장, 회사,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일과 동료에 대해 열정적이던 모습은 시간이 지날 수록 무뎌지고 무감각해지게 되고 오히려 아주 사소한 것들에 뾰족해지고, 날카로워지기도 했습니다. ‘나’ 보다 ‘우리’를 생각하던 사람이 ‘우리’의 테두리를 매우 좁게 바꿔나가면서 마치 고슴도치가 되어버리는 날들도 잦아졌고 말이죠.
아빠가 고지식하게, 까탈스럽게 그리고 아빠가 생각하는대로 너를 키우는건가 하는 생각말야. 아빠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부정당하면 아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구. 엘리의 대부분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모두 엄마와 아빠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믿는건데… – 어쩌면 고집스러운 생각 중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삶의 지혜’ 보다는 모르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진 것만 같습니다. 잦은 변화를 체감하다 보니 사는데 있어서 세워 두었던 ‘기준’들이 자주 흔들리고 때로는 그 기준들 때문에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만의 여정을 잇고 있습니다.
‘우리의 여정’에는 아빠로써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 변화를 함께 체감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처음 엘리의 빨래를 널며 신기해했던 날, 출퇴근 없이 일상을 올곧이 두 여자와 함께 지내던 날,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서도 신경전을 벌여야 했던 날,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고 죄인이 되어야 했던 날, 매일 매일을 재롱을 피우며 어느 덧 거실에서 제법 ‘공연스러운’ 춤을 추던 날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담겨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2026년 4월 4일 / D+
어느 독자의 시선(A)
충분하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에디는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썼다. 그 고백이 이 챕터의 진짜 시작점이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아이를 갖게 됐을 때, 보통은 두 가지 방향으로 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제는 행복하다는 방향, 또는 여전히 힘들다는 방향. 에디는 둘 다 아니다. 이 챕터 내내 에디는 자신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계속 묻고 있다. 답을 내리지 않은 채로.
그게 이 챕터를 읽으면서 계속 걸리는 지점이다.
「어쩌면 고집스러운 생각」에서 에디는 자신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부정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썼다. 「7주년 결혼기념일」에서도 아빠의 기준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물었다. 변곡점에서도, 상담 글에서도. 이 챕터에는 유독 물음표로 끝나는 글들이 많다. 에디가 확신을 갖고 쓴 글이 거의 없다.
근데 「남은 딸기 우유」는 다르다. 거기엔 물음표가 없다. 그냥 남아있던 우유, 그냥 울어버린 것. 설명도 결론도 없이 그날 밤의 장면들만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끝난다. 이 챕터에서 에디가 가장 확실하게 무언가를 느낀 날이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한 날이었다는 게, 묘하게 이 챕터 전체를 요약하는 것 같다.
「버스 이야기」의 “이제는 그저 충분한 느낌이다”라는 문장은 그래서 가볍지 않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14년 동안 맞는지 틀리는지 모른 채 걸어온 사람이, 마을버스 10분짜리 아침을 두고 ‘충분하다’고 쓸 수 있게 됐다는 것. 그게 이 여정의 도착점이 아니라, 에디가 처음으로 물음표 없이 쓴 문장이라는 점에서 읽힌다.
어느 독자의 시선(B)
“나를 허물어 아이의 세상을 세우는, 가장 고요하고도 위대한 투쟁”
에디의 두 번째 기록들을 읽으며, 저는 한 남자가 스스로 ‘고슴도치’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에디의 고백은 오히려 이 서사를 더 진실하게 만듭니다. 준비되지 않았던 마흔의 아빠가 퇴사와 이직, 질병이라는 삶의 거센 파도 속에서 자신의 ‘우리’를 좁히고 또 좁혀 오직 아내와 아이만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이기심이 아니라 가장 숭고한 형태의 방어기제였을 테니까요.
작은 아이의 빨래를 널며 신기해하던 초보 아빠의 설렘은, 어느덧 남은 딸기 우유를 마시고 아이의 전집으로 가득 찬 책장을 바라보는 무던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는 “내가 7살을 이겨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며 기꺼이 져주는 마흔 중반 아빠의 뻐근한 어깨와, 자신의 기준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던 고뇌가 숨어 있습니다.
에디는 삶의 지혜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고 말하지만, 독자인 제 눈에는 보입니다. 에디가 세워두었던 고집스러운 기준들이 흔들리고 무너졌던 그 자리마다, 엘리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자유’라는 새로운 평원이 생겨났다는 것을요. 정답을 몰라 방황했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을 다시 배우려 했던 아빠의 가장 정직한 노력이었음을 말입니다.
사랑은 화려한 고백보다 ‘빨래’와 ‘남은 우유’ 같은 사소한 것들에 더 자주 머뭅니다. 챕터 2는 그 사소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낸 한 가족의 긍지 높은 연대기입니다. 자신의 세계를 기꺼이 허물어 아이의 우주를 넓혀준 에디에게, 그리고 그 여정을 묵묵히 함께한 아내와 엘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제 에디는 더 이상 아이를 어려워하던 예전의 그 남자가 아닙니다. 44살의 나이에 4살 아이와 뒹굴며 “더 자라서 시간이 없어지기 전까지”를 소중히 여기는, 누구보다 단단한 ‘엘리의 아빠’입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세 사람이 맞이할 풍경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이 기록 속에 우리 모두가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는 원형의 온기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