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이 아닌 ‘가족과의 하루가 있는 삶’

일주일 가량이 지났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고, 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메일을 읽고, 회신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정리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고, 회의를 하고, 다시 문서를 작성하고, 이메일을 쓰고,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던 하루 하루를 break하기로 하고, 나는 조금은 어색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와이프와 이제 갓 100일을 조금 넘긴 ‘떡애기’와 함께 어딘가를 매일 놀러 간다거나, 해외를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목표를 갖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멀리 몇 주를 떠나서 나를 찾는 여행을 한다거나 할 수 있는 나이와 상황도 아니다. 내가 병이 든 이유는 결국은 공허하게 종료될지 모르는 무형의 것에 너무 많은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애증이 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break를 원한 것 뿐이고, 그 break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의 break가 아닌, 그간 살아왔던 일상에 대한 break. 그래서, 이 짧으면서도 긴 break를 올곧이 24시간을 나의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한, 가족과의 하루의 삶이 있는 삶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던 와중에 정형돈 기사. 묘한 동질감은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일기장에 몇 줄을 적었다.

…그리고, 빗길을 뚫고 달리다가 사무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와이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 젖을 먹이는 동안에 기사를 보는데, 정형돈이 불안증세로 무한도전과 기타 프로그램들을 잠정 하차한다는 기사. 묘한 동질감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짜여진 틀에서 매일, 매주를 살아야 하고, 일은 더 많아지고, 관계는 더 넓어지는데, 어느 관계는 더 깊어지고, 감당하기 어려웠을테고, 쉬고 싶고, 쉬고 싶었지만, 차마 break를 할 수 없는 마음. 정형돈에게 문자 하나 보내주고 싶었다. Break는 옳은 결정이라고. 그냥 쉬라고. 15/11/13 일기 중.

그래봐야, 일상

꼭 삼시세끼는 아니더라도, 늘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고 있고, 가끔 낮잠도 잔다. 물론 청소, 빨래, 집정리는 해도 해도 표가 안나지만, 그래도 해야 하니까. 간간히 소아과도 엄한 11시, 오후 3시라는 시간대에 다녀오기도 하고, 칭얼대는 애기를 재우려고 유모차를 끌고 밤 10시에 나가기도 했다. 100일이 지난 아기는 오히려 이제 잠을 길게 자는 일이 중요한 것 보다, 잘 먹던 모유에 대한 조금 다른 상황들에 와이프와 내가 근래에는 당황하기도 하고 있으며, 아직도 애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정답을 잘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소소하게 100일 잔치도 치뤘고, 직장인들이 붐비는 곳에서 애기를 데리고 점심 또는 저녁을 먹기도 하였으며, 유모차를 끌고 들어간 식당에서 종업원의 유모차를 대하는 또는 바라보는 시선에 당황도 해 보았다. 물론 짜증도 내 보았고. 수유공간이 있는 곳에서 와이프와 함께 들어가서 기저귀도 갈아주고, 수유하는 와이프도 바라보며 오분, 십분을 함께 하기도 했으며, 와이프가 자리를 몇 시간 비우는 동안 애기 보다가 멘붕도 겪었으며, 우리가 좋아하는 밀탑빙수도 늦은 오후에 즐겨보기도 했다.

이동하는 중간 중간에 차에서 애기는 서럽게 울어제끼기도 하고, 곤히 잠들기도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릴 때면 뒷좌석에 앉아서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있으며, 웃는 모습, 짜증내는 모습, 우는 모습들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있다. 애기와 단 둘이 작은 공간에서 50분을 함께 있었는데, 그 중 2/3는 거세게 울어서 안아주느라 팔이 끊어지는 줄 알았고, 아직은 겁나는 와이프가 운전하는 차를 몰아서 속초 바다를 보여주러 갔는데, 애기는 쌔근쌔근 잠들어 버리기도 하였고, 먼 타지 식당에서 우리 애기를 예뻐해 주는 엄마들도 만났고, 오가는 길에 와이프와 도란도란 행복한 이야기들도 나누고, 그 와중에 엄마와 싸우기도 하고, 그 와중에 수유 후에 몇 번을 게워내기도 하였으며, 그 와중에 뒤집기 절반은 성공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참. 조식뷔페도 유모차를 끌고 가서 먹었고, 와이프 조리원 동기 내외와 아기와 함께 차도 마셨으며, 닭강정도 나누어 먹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해서 비교적 비슷한 일수만큼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동질감이 대화를 이어가게 만들어 주었으며, 맛은 없지만, 한 두가지 요리를 해서 와이프를 기쁘게 해 주었(을까…)고… 그저 이런 심심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래도 오늘도 나에게는 행복한 날. 차가 있어서 멀리까지 두 여자가 편하게 올 수 있었고 카드가 있어서 맛있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와이프가 있어서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아기를 만날 수 있었고 아기 덕분에 내가 24시간 동안 어느 때 보다 훨씬 더 많이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15/11/11 일기 중.

내일은 뭐할까?

‘내일 뭐할까?’ 사실 내일의 일정도 소소하다. 오늘 급하게, 갑자기 한샘 잠실점에 들러서 겨울 커튼을 사고, 맥드라이브에서 버거를 사서 한강에서 먹고, 한강에서 라면도 먹었다.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소소한 일상이지만, 내가 우리 아기와 와이프에게 공헌한대로 나는 그저 일상을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 일상을 저녁이나, 주말이 아닌 올곧이 하루를 함께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내일을 크게 계획하거나, 걱정하거나, 준비하지 않는다. 겨우 그런 일정을 보내기 위해서 라고 누군가가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알려준 최초 나에게 진단해 준 40이라는 수치는 이제 15로 내려갔으며, 그 낙폭의 큰 원인을 너무나도 내가 잘 알고 있고, 사실 해결 방법도 내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break하고 싶었다. 사실상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 삶이 공허한 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분명한 이유’들이 이제 많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매일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매일 더 많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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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를 좋아하고, 여전히 게임과 레고에 빠져있으며, 그래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바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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