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페인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책을 펼쳤다. 몇 주 전인가 갑자기,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작 제목을 그대로 다시 옮긴 그 책이 무척 읽고 싶어졌었다. 내가 스무살 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말이다. 그냥 멍하고 어딘지 모를 허허로운 외로움 때문이랄까. 책을 읽는 초입에서 줄거리도 미도리(당찼던 이미지로 각인 되어있던)를 제외한 주인공들 이름도 떠오르지 않아서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읽는 것 처럼.
스무 살 즈음에 나는 글을 많이 썼었다. 특히 마음을 나누었던 동기에게 시답지 않은 고민과 걱정들 그리고 편지를 쓸 당시의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주 많이도 남겼었다. 이제 열일 곱, 스무 살의 와타나베를 들여다 보면서 나 역시 당시엔 타인들 속에 머무르면서도 끝없이 외로워하고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몹시도 사랑하고 싶어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그랬고 최근의 나 역시 주변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세계만 떠올리며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소음이 짙은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것 처럼.
하지만, 내 주변에 내가 가까이했던 후배들도 그랬다. 책을 읽으며 몇 몇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수년을 일하면서 마음의 병을 얻었던 후배와는 이미 십 여년 전부터 연락이 끊겼고(아니지. 어느 정도는 내 의지도 포함되었지), 일로 만난 친구는 많은 것들을 내어주며 공유했지만 역시 내 곁에 가까이에 있지 않다. 어설프고 서툴렀던 십대와 이십대의 사랑은 모두 솔직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떠도는 감정과 말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한 채로 가슴 아픈 이별들을 했었더랬다. 고작 이십대 초반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겁다고 나는 늘 어두운 모습이 잦았다. 와타나베의 생각들과 표현들에 흠칫 놀라게 되는 장면과 생각의 언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나는 늘 우울했으며 때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에 힘들어 했었고 밖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그것들이 사그라들 때까지 더 깊이 들어갔었다.
생각해보니 커피를 줄이니까 두통이 좀 안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스트레스를 안/덜 받아서 그런 것 같기도… – 와이프에게 보낸 문자
그렇지만, 이제 나도 아주 조금은 익숙해졌나보다. 아니면 나에게 채워진 것들, 나에게 가까운 것들이 이제 잘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큰 창문, 규칙처럼 감기는 태엽같은 일상들, 덜 고민하고 흘러가게 두는 관계와 상황들. 그 안에서 꽤나 자주 찾아오는 작은 여유들, 딸과 나서는 늦은 밤 산책에서의 짧지만 즐거운 시간들, 작게 던지는 와이프의 농담들. 여전히 매일이 복잡하고 불편하고 어려운 일들의 반복이지만 나는 오늘의 나는 잃어버렸거나, 갖지 못했거나, 혹은 놓친 것들에 대한 후회를 덜 하게 되었다. 과거에 내가 ‘갖고 있던 상실‘은 어느덧 추억 정도가 되었고,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상실’은 굴곡치는 감정과 열정들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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