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엄마는 절대적이었다.

a nostalgic 1980s Korean street scene, a boy stepping out of a small three-story house facing a school gate, family members bustling around, warm yet heavy atmosphere, cinematic lighting, muted pastel colors, soft grain film style –ar 3:2 –v 6 Job ID: 366e0088-1270-443c-8655-9f6e9cd8f01e

3층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고개를 들면 바로 앞에 교문이 보이는 집에서 살았다. 당시에 나는 엄마와 엄마의 언니 즉 이모네 식구들과 함께 살던 때로 기억한다. 식구가 족히 10명은 됐었고,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이 엄마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했었다. 엄마는 봉재공장을 운영하면서 내가 혼자 크지 않게 하려고 이모네 식구들과 합가를 했었고, 어떻게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앞에 그렇게 많은 식구들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했다. 덕분에 나는 등하교 시에 픽업이나 드랍 그리고 통학의 개념을 모르고 자랐고, 80년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먼거리에서 걷고, 버스를 타고 오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굉장히 ‘운’이 좋았던 셈이다. 하지만, 그건 운이 아니라 엄마의 어려운 ‘선택‘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집안에서도 집밖에서도 꽤 ‘예쁨’을 받으며 자랐다. 엄마는 가장으로서의 파워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사장님’의 권위에 따른 일종의 ‘특혜‘였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운영하던 공장은 집에서 10분거리였고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과도 나는 꽤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수 많은 이모, 삼촌들은 그들이 일하는 옆에서 내가 노래를 불러주면 당시 100원을 주기도 했고, 나에게 이것 저것을 가르쳐줬던 기억들이 조금씩 남아있다. 집 근처의 경양식 집(아마 까망하양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에 나를 자주 데려가던 이모도 있었고, 쌍절곤을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던 삼촌도 있었고, 변신로봇 장난감을 선물해준 이모도 있었다.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은 아마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맞는 수준이었을테지만 그들은 내게 굉장히 친절했고, 많은 배려를 해 주었으리라. 게다가 공장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나는 금액을 확인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과자나 빵 등을 마음껏 가져가서 먹을 수도 있었다. 아마 내가 가져간 만큼 계산해 두었다가 월말이나 월 초에 엄마에게 청구하는 후불제이자 외상이었으리라 당시에도 짐작은 했었다.

엄마와 함께 했던 짧지만 잦은시간들도 기억한다.

엄마. 나 뭐가 먹고싶어.

밤에 엄마와 나는 다른 식구들의 눈을 피해서 ‘야식‘을 자주 먹었던 것 같다. 늦은 밤에 나는 뭐가 먹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고, 엄마는 늘 따뜻하게 ‘우리 아들. 뭐가 먹고 싶어?’라고 안아주며 되물었고, 뭔가를 내가 말하면 엄마는 그 ’뭔가‘를 내게 안겨주셨다. 하나 뿐인 아들을 당신이 직접 케어할 수 있는 시간은 밤 뿐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a tender late-night kitchen scene, a Korean mother and young boy sharing midnight snacks in secret, warm dim lighting, soft shadows, nostalgic atmosphere, emotional intimacy, painterly realism –ar 16:9 –v 6 Job ID: 5f12eff9-6bcb-49c9-81ee-e9e905713947

하지만, 나는 엄마를 무서워했다. 이모들과 삼촌들과 그리고 함께 살고 있던 식구들과 엄마의 마찰들을 나는 자주 보고, 듣곤 했기 때문이겠지만, 엄마의 호통은 늘 무서웠고,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눈물은 늘 무거웠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절대적인 힘‘에 나는 무한한 신뢰를 보였고, 엄마가 다 옳았고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엄마의 호통을 나는 끔찍하게 싫어했고 동시에 무서워했다. 한편으로 나는 많은 것들을 묻지 않았다. 절대적인 존재가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라는 어렸지만 내 나름의 ’왜’에 대한 해답을 미리 생각해버렸고, 그래서 엄마의 호통과 눈물에 대한 ’왜‘를 나는 거의 묻지 않았다.

그렇게 유년기 나에게 엄마는 늘 한없이 따뜻했지만, 강한 엄마였다.


엘리에게 나는 어떤 아빠일까?

엘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도 되는지 아빠에게 물어봐달라고 했다며, 와이프가 전했다. 나는 단호하게 ’안돼’라고 말했고, 와이프는 그 이유를 녀석에게 적절하게 전하지 못한 것 같다. 대충은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안되는 이유를 녀석에게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댄스학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녀석은 그 이유를 내게 다시 물었다. 나는 거의 20분간 일장 연설을 쏟아내고 말았다.

왜 안되는거야? 엄마 폰으로 내 일상을 영상으로 올리기만 할거야 – 엘리

이미 유튜브가 있는데 왜? – 나

유튜브에서는 게임만 공유하고 일상은 인스타그램으로 하고 싶어 – 엘리

인스타그램에서 친구를 맺고 친구들의 피드를 들여다보는 건 인생에 도움이 안돼 – 나

엘리는 방어 논리를 찾아냈다.

인스타그램에서 친구 안 맺을건데? – 엘리

그럼 유튜브로 하면 되는거 아냐? 인스타그램 때문에 사람들이 피폐해져 – 나

피폐한게 뭔데? – 엘리

힘들어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거 – 나

난 안그럴건데? – 엘리

그 뒤에 나는 인스타그램에 대한 이야기의 논점을 벗어나서 어딘가 ‘엄마’의 절대적인 힘으로 대화를 밀어내버렸다.

로블록스도, 유튜브도 엘리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자유를 아빠가 주고 있는데, 아무리 초등학생이라지만 엘리는 더 원하는 것 같아. 몇 달 전에 아빠가 책 읽어야 한다고 말한 뒤로 책을 단 한권이라도 읽었을까? 읽지 않았잖아.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어. 해야 할 일도 있는데 엘리는 하고 싶은 것만 제약 없이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을까? – 나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며 자신과 비교하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는 어리다.’ 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의 아킬레스 건인 ’책’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고, 녀석은 학원에 그 자세 그대로 들어가려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거야?‘라는 내 말에 방향을 틀어서 다시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나를 안고 잠깐을 그렇게 길에서 서 있었다.

a symbolic portrait of a father and daughter standing together on a quiet urban street at night, the daughter hugging the father tightly, emotional weight in their posture, cinematic contrast, subtle glow, realism with poetic undertones –ar 3:4 –v 6 Job ID: 3b0c0723-4c84-454c-a24d-6d8dd7861b78

나는 많은 것들을 케어하려고 하고, 최대한 긍정적인 보호막 안에서 엘리를 키우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느낀다. 다행스럽게도 녀석도 내 의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고 따르고 있지만, 반대로 녀석이 직접 경험하고, 판단하게 해야 한다는 내 의지와는 모순되는 말과 행동을 이렇게 자주 하곤 한다.

나는 녀석에게 어떤 아빠일까.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어서 녀석의 유년시절에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건강했을까. 장난 많이 치고, 자주 웃겨주고, 어디든 함께 해 주는 그런 따뜻한 아빠였을까. 냉랭하게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필요한 답만 하고 혼자만의 시간만 찾고, 기분에 따라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어떤 것들을 못하게 결정해 버리는 그런 아빠였을까.

감당하기 벅차지만 그래도 짊어져야 할 부모의 무게

아까도 언급했지만, 육아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 일관성을 맞추기 위해 많은 부모들은 매일,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마치 기계적으로 우리네 부모님들이 했었던 것 처럼, 바르게 살아야 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등 유년시절에 배웠던 사소한 진리들을 가르쳐주고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 몇 마디 안되는 짧지만 인생의 철학을 담아야 하는 일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서 그 무게가 오늘따라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아마 엘리가 이제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이제는 고루하게 늙고 있기 때문일까. 그저 웃으면서, 쉽게 쉽게 마주보고, 농담하고, 지나치는 풍경에 대해 감탄하고, 오늘 주어진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면 되는 것인데, ‘아빠’, ‘엄마’가 해야 할 ‘과업’으로 다가오면, 덜컥 무거워진다. 언젠가 어느 날엔가 엄마의 무게가 그랬듯 그래도 나는 오늘도 그 무게를 지고, 아빠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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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를 좋아하고, 여전히 게임과 레고에 빠져있으며, 그래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바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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